- 2010/10/18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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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그러는거 아닐세! 이 몹쓸사람!! 이 걸오같은 놈!!"
"너말이다... 늬가 걸오라고 별명붙인 주제에 당사자한테 걸오같은 놈이라고 욕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
"흥! 내가 붙인 별명이니 내 맘대로 부를걸세! 이 나쁜놈! 이 걸오같은 놈!"
"어이구, 이 웬수..웬수!!!!"
재신은 동재에 다다러서야 푹 곯아떨어진 용하를 거칠게 제 방 안으로 집어 던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재신이 돌아온 이후로 중이방은 동재생들도 근처에 가길 꺼려하는 곳이니 누가 들어올 염려는 없을거다. 이런 꼴을 한 채로 다른 놈들이 있는 방으로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오늘 하루만 재워야지 어쩌겠는가.
"음냐...거로오..음..."
이제는 하다하다 꿈속에서도 욕을 하나보다. 그렇게 한이 쌓였으면 보지 않으면 될 것이지 또 눈앞까지 찾아와서 꼬장을 부리는 건 무슨 놈의 심보란 말인가. 그렇게 용하를 던져두고 구석에 누워 잠드려하는 재신의 눈에 못내 목가의 상처가 걸렸다. 아까는 달빛밖에 없는 어둠 속이라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희멀건한 피부에 생긴 붉은 멍은 보고싶지 않아도 유달리 눈에 띄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 속 썩이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일 거다. 망할 놈. 사람 속도 모르고 세상 모르게 잠든 용하가 얄미워 노려보다 결국 벽장 어딘가에다 쑤셔둔 고약을 찾아꺼내 웃옷을 벗기었다.
"이런 개..."
희여멀건하니 아주 도화지가 따로 없구나. 이리저리 얼룩덜룩. 어찌나 센 힘으로 잡힌건지 양 손목에 새빨간 자국을 시작으로 어깨, 쇄골, 가슴팍, 허리, 목까지. 벌건 순흔자국과 시퍼런 멍자국으로 점철된 용하의 몸을 보자 윗쪽도 이런데 아랫쪽은 안봐도 뻔한지라 재신의 주먹이 다시 한 번 세게 쥐어졌다. 하인수 이 개새끼, 개아들놈의자식, 언젠가 그 면상을 너덜너덜하게 패줄테다.
"으응..."
갑자기 옷이 벗겨져서 추운가보다. 몸을 부르르 떨며 이불을 목까지 덮어올리는 용하의 모습에 재신은 한숨을 쉬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랬다. 다시 이불을 걷어내자 또 끌어당기고 걷어내자 또 끌어당기고, 한참을 씨름하던 끝에 재신이 짜증을 벌컥내며 이불을 문밖으로 집어던진 끝에야 허공에 팔을 휘적거리며 이불을 찾던 용하는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며 다시 잠잠해졌다.
"이건 무슨 다친 개새끼 돌봐주는 것도 아니고...문재신 성질 많이 죽었다, 진짜."
잠에 취해도 아픈 건 아픈가 보지. 서툰 손짓으로 약을 위에 바르자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뒤트는 바람에 깼나? 싶어 식겁한 채 바라보았지만 미묘한 신음소리만 흘리고 다시 얌전해진 용하의 모습에 겨우 참았던 숨을 내쉬고 다시 약을 발랐다.
"...윽....으으..읏.."
엄살부리는 버릇은 여전한가 보다. 위에 손가락만 갖다댔는데도 움찔대는 바람에 여러번 약병을 집어던지고 기겁하며 구석에 숨기를 여러번, 겨우 약을 다 바르고 용하의 저고리를 여미는 재신의 표정은 착잡하기 그지 없었다. 아랫도리도 봐줘야하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이리 기생오라비처럼 생기긴 했어도 사내놈이다. 같은 사내새끼 앞에서 아랫도리를 까게 할 수는 없지.
"친구 좋아한다. 에라이, 이 썩을놈아."
나쁜 놈, 천하의 나쁜놈. 친구좋다는게 뭔가, 지 좋을때만 친구라고 들러붙더니 정작 지 마음속에 응어리만 묻어놓고. 친구는 이런 거 얘기하려고 있는 거 아닌가. 지멋대로 친구라고 부를 땐 언제고 왜 이런것만 나한테 말하지 않은거야. 하인수 개자식, 내 언젠가 그 녀석 아가리를 완전히 찢어놓을테다. 그래도 구용하 놈이 더 나쁘다. 한마디 언급이라도 해주지. 그 넉살좋은 놈이 얼마나 서럽고 속상했으면 저렇게 코가 비뚤어지도록 술을 마셨을까. 개새끼. 문재신 이 눈치도 드럽게 없는 개자식아. 눈물이 나도록 제 머리를 쥐어박자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가시는 것 같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네놈 그말 다 헛소리다. 난 자네처럼 글도 못쓰고 운동도 못해? 야임마, 그럼 나는 뭐 태어날때부터 붓잡고 태어나고 말타고 태어났는 줄 아냐? 돈이 많아도 권력이 없어? 너 그런 돈도 없는 사람들 앞에서 그런 소리 하면 천벌 받는다. 네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도 다 네 복이고, 능력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네놈이 그렇게 약한 척 해봤자, 난 널 절대 용서하지 않을거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릴 지껄이고 있는겐가. 그리 생각을 해보아도 이미 재신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은 멈출 생각을 않았다.
"...다만, 네 놈 이야기를 듣고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나처럼 살 수는 없다고. 나에겐 나만의 사는 방식이, 너는 너만의 방식이 있다고. 여전히 이해도 가지않는 괴론이지만... 납득은 하기로 했다. 그러니 그 고약한 양반이 그리 저세상으로 간거겠지, 망할."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몰라 용하의 얼굴을 멋쩍게 바라보아도 세상 모르고 잠든 얼굴이 얄밉기만 하다.
"형이 있었다. 어찌나 얄밉게도 옳은 말만 골라하시는지, 혼나면서도 다 맞는 말씀인지라 반박도 하지 못하고 약만 잔뜩 올랐었지. 참 얄밉고, 고약하고... 근사한 양반이었다."
형. 영신의 죽음 이후로 참 오랜만에 읊어보는 호칭이다. 가슴 속에 품고 살기엔 너무 울화통이 터져서 다 잊었다 생각했는데 술주정 부리며 난리를 치는 요 녀석을 보고 왜 형님이 생각나는겐지, 닮은 구석이라곤 요만큼도 없는데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은, 형과 크게 싸움을 벌였다. 이번에도 당연히 내 잘못. 사소한 오해가 생겼는데, 그 놈의 반항기가 뭐라고.. 그 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결국 주먹까지 올라간거야. 그리고 며칠 간 그 인간이랑 말 섞을 생각도 않았지."
고놈 참 잘도 잔다. 주절주절 떠드는 소리가 시끄럽지도 않은지 숨소리까지 색색거리며 자는 얼굴이 우스워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배어나왔다.
"그리고 그 오해를 풀 새도, 사과를 할 새도 없이 그 인간은 시체가 되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떨리는 손으로 조용히 옆에 놓인 술병을 집어들었다.
"사실 알고있었다. 그 양반이 그런 어처구니 없는 짓을 할 양반이 아니라는 걸.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다는 걸. 그런데... 별 지랄같지도 않은 오기가 생겨버린거다. 항상 잘나기만 한 양반이라, 어떤 꼬투리라도 잡아서 흠집 하나를 내고 싶었던 거야. 나는 이리 문제만 피우고 다니는데 왜 당신만 그리 잘난거냐. 당신도 한 방 먹어봐라. 내가 이랬으니 당신도 그랬을거다...안 그러면 내가 너무 그 인간에 비해 초라해 보이잖냐? 어린 맘에 바락바락 대들면서 차마 못할 말까지 날렸지. 그리고 어떻게 할 사이도 없이, 사과 한마디면 끝날 일인데 그 사과를 영원히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
"조금만, 조금만 더 믿었으면. 조금만 더 형님을 생각했다면 이렇게까지 일이 더럽게 꼬이지는 않았을텐데. 그걸 알기엔 너무 철이 없었다. 그걸 깨달은 건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된 후였고."
어쩌면, 나는 너를 이용해 그 족쇄에서 벗어나려고 한 걸지도 모른다. 이번에야말로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그래서 사실, 그 얄미운 주둥이에서 변명 한마디 정도는 꺼내주길 바랬다. 내가 나쁜 게 아니라 하인수 그 개새끼가 나쁜거라고.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그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여전히 난 마음 한 편으로는 널 의심하면서 살았을거고, 넌 또 그런 내 눈치나 보며 살았을거고. 모든 사람이 너랑 똑같이 살아간다곤 생각하지 마라. 그거 아주, 안 좋은 습관이다. ...그 썩을 인간이 또 맞았다. 그렇게 변하자고 다짐했는데, 결국 2년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더군."
평소에는 능글맞기 짝이 없던 놈이 왜 자는 모습은 이리 어린애같누. 문 밖에 널부러진 이불을 탁탁 털어 다시 용하의 몸 위로 덮어주었다.
"...그러니까 믿으니 뭐니, 그런 개소리는 집어치우기로 했다. 네 놈과 하인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네 놈이 무슨 심정으로 그 녀석에게 뒤를 대주는 건지, 둘 사이에 무슨 밀담이 오고갔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은 생각도 없어. 다만.. 이해해보기로 했다. 나와 네가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다고, 말이다."
니미럴. 내가 지금 술취해 뻗은 새끼한테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쯤되면 세상 모르고 잠든 용하가 얄밉기까지 해 괜히 헤-벌린 주둥이를 찰싹 쳐보았다.
"아무튼 도대체 무슨 망령이 들러붙었는지 사람 귀찮게 하는덴 도사에요. 자라, 자."
아무래도 오늘은 차분히 잠이 들수 있을 것 같지않아 문을 열고 나가려던 재신은 아까 못다한 말이 떠올라, 답지않게 한참을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그 동안 사람 속도 모르고 긁어대서."
역시 이런 낯간지러운 말은 재신에게 맞지 않나보다. 에이, 쓰벌!! 엄한 허공에다 화풀이를 내던지며 거세게 문을 닫고 튀어나
가버렸다.
"우으.....응?"
어찌나 술을 들이켰는지 깨질듯한 머리를 감싸쥐며 일어난 용하는 주위의 풍경을 보고는 어리둥절해졌다. 청재임은 확실한데 자신의 방과는 너무 다른 이 곳은 어디란 말인가. 용하의 방은 이리 살풍경하지 않다. 장식이고 뭐고 방안에 있는 거라곤 빈 술병 몇병과 누더기같은 시커먼 도포....... 응? 시커먼?
"......오메나......"
떠올리지 않아도 될 어젯밤의 기억이 그제야 생생히 떠오른 용하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두손으로 가렸다. 걸오 이 친구, 날 보면 죽인다, 죽인다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기어이 날 죽이려고 이 곳에 끌고온 게 분명하다. 어서 도망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일어선 용하는 그제야 제 두루마기와 도포가 연못 어딘가에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을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걸오도 아니고 아침에 이런 차림으로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 이 일을 어쩌면 좋누. 안절부절하던 용하의 눈에 구석에 놓인 유생복이 보였다.
"으잉?"
...입어보니 재신의 옷인 모양이다. 키도 몸집도, 왜소한 용하와 너무 차이가 나는 재신의 옷을 입자 질질끌리다 못해 바닥에 걸레처럼 먼지를 쓸고다니는 바짓자락하며, 손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소매를 휘적거리는 모양새가 어린아이가 제 아비 옷을 훔쳐입은 양 제법 우스꽝스러웠지만 어떡하겠는가. 속곳차림 같은 아까보단 훨씬 낫지. 옷은 나중에 몰래 놔두고 지금은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다. 서둘러 문을 나서자마자 가장 마주치지 않았으면 하는 얼굴과 마주쳐버렸다.
"일어났냐? 하도 고약하게 자길래 해가 중천에는 떠야 일어날 줄 알았더니만."
호랑이굴에서 달아나자 그 앞에 호랑이가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딱 이런 기분일 것이다. 불쑥 튀어나오는 재신의 모습에 용하는 비명을 지를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으....으, 응,으응. 자.. 자네는. 잘 잤나?"
"...어때보이냐?"
아무래도 용하는 어젯밤 재신의 성질을 긁어놓은데서 끝나지 않고 잠자리까지 빼앗아 버렸나보다. 산발이 된 머리와 소맷자락에 나뭇잎을 잔뜩 묻힌 재신의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트릴뻔한 용하는 다시금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웃음을 억눌렀다.
"나가려면 빨리 나가던가. 이젠 내 방도 못 들어가냐?"
"아!! 미, 미안하네."
누가보면 내외라도 하는 줄 알겠다. 잽싸게 옆으로 몸을 비켜내는 용하를 뚱하니 바라보던 재신은 텅 빈 줄 알았던 벽장에서 조그만 단지를 찾아 용하쪽에게로 던졌다.
"?"
"상처에 바르면 좋다더라. 내 방엔 썩어나도록 있으니까 쓰던가, 말든가."
"고.. 고마우이."
걸오 자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는데 어디 몹쓸병이라도 걸린겐가. 서먹한 사이만 아니라면 그렇게 물어봤을거다. 대판 싸우기 전에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재신의 과잉친절에 오히려 불안해진 용하가 고약을 소매 속에 집어넣고 돌아서려 할 때, 다시 재신의 목소리가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내 방 말이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삐그덕, 침을 꿀꺽 삼키고 뒤를 돌아본 용하가 경직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그그그그게 말일세, 나, 나나도 기억이 하나도 안 나지 뭔가~ 왜 내가 여기 누워있는게지, 여긴 누구요, 또 나는 어딘가.... 뭐, 그런 정신적 공황에 빠져있었다고나 할까.... 아...아하하하...."
"이 방 새끼들이 지레 겁먹고 도망간 바람에 평소엔 빈방이다. 혼자 술 처마실거면 거기서 마시던가, 말던가."
"어....?"
"...썩을. 같은 말 두 번 안 한다. 취하려면 곱게 취하던가, 울거면 좀 곱게 처울던가, 그게 안되면 엄한 사람한테 꼬장부리지 말고 혼자서 처울라고!!!"
"......"
솔직하게 말하는 법이 없는 사내다. 뭉클해진 용하의 눈과 마주친 재신은 자신의 낯뜨거운 말이 무안한건지, 용하의 눈빛이 무안한건지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좌불안석이던 방구석에서 일어났다.
"니미럴. 언제까지 그렇게 서있을거냐? 이젠 방도 혼자서 못 쓰겠군. 난 조반이나 먹으러 갈란다."
"저, 저기.. 이보게, 걸오!"
...그제야 기억났다. 재신의 옛 동방생이 괜히 걸오라는 이름을 잘못 꺼냈다가 근 2달간을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슬픈 전설의
미친 말 살인사건.
"...오마나"
뒤늦게서야 입을 막았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애초에 걸오라는 호칭에 눈이 뒤집혀 사람을 그리 개패듯 팬 것도 용하와의 싸움이 원인 아니었나. 근데 그 당사자가 걸오라는 호칭을 또 불러버렸으니... 발걸음을 멈춘 재신의 뒷모습을 보며 용하는 지금이라도 뒤돌아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이미 두려움에 다리가 얼어붙어 움직여주질 않았다.
"또 무슨 일이냐?"
헌데 이 미친 말의 대답하는 꼬락서니에 두려움이고 뭐고, 머리가 새하얘졌다.
"어....."
"사람을 불러놓고 왜 말이 없어?"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거의 1여년을 그렇게 하루도 빼먹지 않고 걸오라고 불러도 늘 무시하던 놈이 걸오라고 부르니까 왜 부르냔다.
"자.. 자네, 지금 내가 뭐라고 불렀는지 제대로 듣고 대답한겐가?"
"그럼 여기에 그런 괴상한 별호를 가진 놈이 나말고 뉘 있어서?"
"그러니까.... 자네가 걸오란 말이지? 내가 걸오라고 불렀는데 자네가 대답을 했단 말이지? 이제 걸오라고 불러도 된단 말이지?"
"아, 거 좋지도 않은 이름 걸오걸오 그만 불러라. 사람 짜증나게."
또다시 징징대는 목소리에 짜증을 내며 용하를 뒤돌아보던 재신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웃었다.
"그보게~ 걸오라는 이름 참 좋지 않은가? 사람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라니, 폼도 나고!! 자네한테도 잘 어울리고!"
얼굴에 가면처럼 쓰고다니는 그런 가짜 미소가 아니라, 진짜 웃는 얼굴이다.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저 녀석, 이런 얼굴로 웃을 줄도 아는구나. 아니, 웃기도 하긴 하는구나. 네 놈.
"이제 자네도 나를 여림이라고 불러주시게~ 항상 구용하, 구용하, 남처럼 부르는 자네는 미우이!! 아니면 '부용화'라고 불러주는 건 어떤가? 나는 어떤 이름이든 대환영일세~"
하마터면 딸꾹질이 나올 뻔 한걸, 재신은 가까스로 참았다.
"미친 놈. 내가 미쳤다고 그런 말도 안되는 이름을 입에 올리겠냐. 내 입까지 더러워지지."
"우웅, 섭섭허이~ 이 이름이 얼마나 이쁜데 그걸 모르고!"
그래도 상관없네, 이제 자네를 걸오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으니 그걸로 되었어! 그깟 이름이 뭐가 그리 대수라고 감격의 눈물까지 글썽이며 웃는 용하의 미소를 보자니 갑자기 재신도 따라서 웃음이 나왔다.
"다시 깨방정떠는 거 보니 이제야 구용하답구만. 가서 그 치렁치렁한 옷이나 어떻게 해봐라."
헌데 이 녀석, 너무 봐줬나보다. 정신줄이라도 놓은 것처럼 낄낄대던 용하가 갑자기 뒤에서 목을 졸라오며 안기는 바람에 재신은 또다시 딸꾹질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정말이지 나를 챙겨주는 건 자네밖에 없으이~ 내 오늘부로 모든 지조를 자네에게 바치겠네. 서방님이라고 불러드릴까?"
"끄흐억!! 이 새끼가... 오냐오냐 해줬더니 어제부터 눈에 뵈는 게 없지!!!!"
미친 놈에겐 매가 약이다. 그 방정맞게 실실대는 목덜미를 낚아채 팔을 두르고 힘을 주자 용하도 그제야 제 정신이 돌아온 듯 두 팔을 버둥거리며 외쳤다.
"커컥.. 걸오, 이러다간 진짜 살변이 일어나는 수가 있으이.. 내 기왕 죽는다면 이런 꼴사나운 모습보단 좀 더 아름답게 죽고싶네!!"
...방금 한 말 취소. 아무래도 정신줄은 여전히 나가있는 모양이다. 켁켁대면서도 예의 초승달같은 눈으로 깔깔대는 걸 보면.
"........."
"아."
멀리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든 재신과 용하의 표정은 서로 다른 의미로 굳어졌다. 서재에서 찔금3인방을 몰고오던 인수와 마주친 것이다.
"자, 장의, 좋은 아ㅊ... 켁"
무거운 정적을 깨려 용하가 입을 열었지만 팔에 더욱 힘을 주는 재신에게 목이 졸려 금방 무산되고 말았다.
"......"
"......"
살기어린 눈빛이 오고가는 가운데, 또다시 정적을 깬 건 재신 쪽이었다.
"별 같잖지도 않은 면상을 보니 없던 입맛도 달아나는군. 어이, 구용하! 아침부터 더워죽겠다. 등목이라 하러가자!"
"으, 응? 이제 겨우 일어난 사람한테 등목은 무슨...꾜호호!! 왜 오 보으 자오끄아아에아(왜 또 볼을 잡고 끌고가는겐가)!!!"
목을 죄여오는 팔이 풀리기가 무섭게 두손가락으로 야무지게 볼을 쥐어비트는 재신의 손가락에 용하는 또다시 동재가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어쩐지 조용히 넘어가나 했더니, 이 녀석 어젯밤 일을 내내 마음속에 담아둔 게 분명하다. 이런 쪼잔한 놈! 떨어져나가라 비틀리는 볼을 붙잡고 용하가 울먹거리는 사이에, 갑자기 인수를 향해 혀를 베- 내밀며, 용하를 끌고 사라지는 재신의 모습에 찔금3인방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 뭡니까, 방금 그거...? 우리를 놀리는 건가?"
"저 자식이 미친 말, 미친 말 하더니 진짜로 미쳤나? 지가 무슨 삼척동자도 아니고 수염까지 난 놈이 징그럽게 무슨..."
"재미있군."
험상궃게 혀를 내밀다 뒤로 돌아서는 순간, 재신의 입에서 아주 잠깐 스쳐지나간 미소는 인수에게 밖에 보이지 않았다. 승리자의 미소라는 건가... 뭐, 잠깐동안 희망 속에 살게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잠깐이나마 맘껏 즐겨봐라.
"나..나으리?"
"가자."
그렇게 생각함에도, 재신의 미소가 자꾸 약이 오르고 괘씸한건 아마 기분 탓일게다. ...암, 그렇고 말고.
"...생각해보면 3년간 참 많은 일이 있었지."
그리 극적인 화해를 한 뒤 2년, 금방 터질거라 생각했던 인수와 재신의 싸움은 예상외로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용하는 여전히 인수와 어울려 다니고, 또 재신과 어울려다닌다. 재신도 그런 관계를 못마땅해하는 것 했지만 그 원망의 대상은 용하가 아니고 인수이니 아무렴 어떠랴.
-다만.. 이해해보기로 했다.
2년 전 그 날 밤, 잠결에 얼핏 그런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생각 난 김에 오랜만에 우리 걸오와 추억이야기라도 해볼까.
"여~ 걸오!"
"뭘 또 그렇게 실실 쪼개고 다니냐, 기분 나쁘게시리."
베실베실대며 목 뒤에서 매달리는 용하에 재신은 한숨을 쉬며 머리에 수도(手刀)를 내리꽂았다. 2년 전 그 날부터 녀석이 결정적으로 변한게 있다면 이 웃음일게다. 처음에 제대로 된 웃음을 봤을 때는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그것도 한두번일 때 얘기다. 차라리 입만 웃고다닐 때가 더 나았지, 이렇게까지 하루종일 낄낄대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그 날 술을 너무 마셔 정신이 나간건지, 내가 얕보여서 이리 웃는건지, 알 수 없어서 더 기분나쁘단말이지. 사내새끼가 실실거리는 것도 징그럽고.
"우리가 이렇게 알고 지내게 된지 얼마나 됬지?"
"미친.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일일히 외우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한 4년 되었나?"
"넌 네 놈 성균관 들어온 날도 잊어버렸냐? 3년이다, 사......모른다니까!!!!!!"
역시 솔직할 줄을 모른다니까. 귀끝까지 시뻘개져서 소리지르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지. 내가 이래서 자네를 좋아해.
"역시 내가 3년 전에 말한 예언은 이루어진 것 같네."
"예언이라니, 무슨?"
"말했지않나~ 자네도 내가 맘에 쏙! 들게 될 거라고."
"이게 어디서 무슨 소리를 주워듣고 와서.... 야, 너냐?! 식이한테 둘이 친하다는 둥 어쩐다는 둥 망발을 지껄인게 너지?! 그치!!"
"응? 무슨 소린가? 대물 도령이 뭐가 어쨌다고..."
"오리발 내밀고 있네!! 너 이자식, 이리와. 오늘이 아주 니 제삿날이다!!"
"가, 갑자기 왜 이러는가!!!! 이보시게!! 여기 사람 하나 죽게 생겼네~!! 살려주시게~!!!!"
"그래, 오늘이야말로 살변 한 번 일으키보자!! 이 망할놈아!!"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3년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서로가 만나고, 서로간의 마음을 터가고, 싸우고, 화해하고, 웃고, 울고, 떠들고, 그리고 또 다른 동무들을 만들어가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지는 모른다. 또 싸우고, 울고, 상처입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래도 마지막은 웃으며 지나칠 수 있으리라.
아아,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용하는 잽싸게 도망가는 와중에도 해맑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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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게 나는 블로그보다 카페에 더 먼저 글을 올리냐... 그것도 한참 전에 -0-;;;;;;
새벽에 그 동안 써둔 거 폭풍업뎃 해보았슴다
- 2010/10/18 07:43
- eonshick.egloos.com/1005097
- 덧글수 : 0
성균관 내에 두고두고 전설로 회자될 미친 말 살인사건(?) 이후 2달 뒤, 피해자가 두달 간 집에서 요양을 마치고 돌아온-그 마저도 문재신의 문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지라 부득이하게 방을 동재 맨 끝으로 옮겨야했다- 그 날, 두 달 동안 자택근신령을 받은 재신도 피해자 못지않게 퉁퉁부은 얼굴로 돌아왔따. 집으로 끌려간 그 날, 흠씬 매질을 당하고 2달을 꼬박 광살이를 한 탓이다. 재신이 자칫했으면 사람을 죽였을 뻔한 그 날 밤, 용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신은 알지 못한다. 아니, 알고싶지도 않다. 분명한 것 하나는 그 날을 경계로 둘의 관계가 완전히 끝장났다는 것.
"...어."
동무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어 걸어오던 용하와 눈이 마주쳤다. 2달이 지나도 놈의 모습은 여전했다. 여전히 낭창낭창한 허리하며, 백옥같이 흰 피부, 여리여리한 얼굴선, 초승달같은 눈, 연지라도 찍은 듯이 붉은 입술.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다시는 그 환하던 미소를 못보게 된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 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재신을 보자마자 웃음을 멈추는 모습이 짜증났다. 부채로 급히 얼굴을 가리는 모습도, 당황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 모습도, 답지않게 말을 머뭇거리는 모습도 짜증이 나서...
"......"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기로 했다.
"......"
"까, 깜짝 놀랐네... 아니, 자네 목숨이 몇 개나 되길래 저 문재신한테 말을 걸려고 하나? 그러고보니까 걸오라고 별호 붙인 것도 자네지? 어이구, 그 이름으로 불릴 때 저 놈 표정을 자네도 보는건데..."
평소대로 소문내길 좋아하는 유생의 잔소리는 용하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그 날 밤 사이에 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더 이상 용하가 재신을 불러도 그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웃지도, 화내지도, 혀를 차지도 않는다. 걸오라 불러도, 재신이라 불러도, 화를 내도, 애교를 부려도, 육두문자를 날려도 용하를 바라보는 일은 다신 없으리라. 그런 생각이 들어 용하는 접선으로 얼굴을 가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진작에 끝내야 했을 사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러고보니 그 두사람, 요즘 들어 붙어있는 모습을 못봤군."
"두 사람?"
"왜, 여림과 문재신 말일세."
"아~ 그 괴짜들? 뭐, 당연한 얘기 아닌가? 여림 그 친구가 목숨이 10개가 넘는 것도 아닌 이상에야 어떻게 그 미친말한테 말을 걸겠냐고."
"뭐, 그럼 전에는 목숨이 10개가 넘어서 말을 걸었고? 그렇게 주먹세례를 받으면서도 꾸역꾸역 따라다니더만..."
"이 친구야, 주먹세례랑 맞아죽는 거랑 똑같아? 살인사건 일어날 뻔한 그 이야기 듣고 여림 놈이 드디어 제정신을 차린게지. 안 그래도 보는 내내 내 가슴이 철렁철렁했는데 잘 됬구만~"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는 사이이다. 계집처럼 곱상한 미소년과 야차같은 사내의 조합은 그리 보였고, 성균관 최고의 마당발과 성균관 최고의 불량아의 조합은 더욱 그리 보였다. 속사정을 모르는 유생들은 용하가 드디어 미친 말에 대한 어줍잖은 호기심을 버리고 주특기인 여색으로 돌아온 것에 쌍수벌려 환영을 표했다.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면 안 그래도 미친 말이라 이름붙은 재신의 광증이 말그대로 미치기라도 한 듯이 심해졌다는 것. 그 뒤로도 기숙사라는 특성상 용하와 재신이 마주치는 일은 몇 번인가 있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처음 몇번인가는 용하 쪽에서 재신에게 다가갈 시도를 했던 듯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미동조차 없는 재신의 반응에 용하도 결국은 포기해버린 것이다.
용하가 인수와 어울려다니기 시작하면서 둘의 접점은 더욱 줄어들게 되었다. 그렇다고 재신이 용하에 대한 감정을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다. 서로 눈만 안 마주칠 뿐, 재신 특유의 동물적인 감각은 용케 용하와 인수의 눈을 피해 용하의 뒤를 쫓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도둑처럼 몰래 지켜보는 건 재신의 성미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눈에 뜨이는 걸 어쩌겠는가. 정신만 차리면 저도 모르게 용하의 뒷모습을 쫓고있는 것을. 왜인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이 쪽이 묻고싶다. 왜 내가 저 쓰레기같은 놈을 신경쓰지 않으면 안되냔 말이다, 왜!
한 달 여간 용하를 관찰하며 느낀 점은 생각보다 많은 변화가 용하에게 찾아왔다는 것이다. 두 달 동안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일단 옷과 장신구. 평소에도 화려한 걸 좋아하는 녀석이라 생각은 했지만 이건 그 정도가 너무 심해졌다고나 할까. 알록달록 무지개 빛에 꽃무늬까지 계집이 따로 없다. 더욱이 그 취향이 인수와 같이 있을 때 더욱 과장되 보이는 건 재신의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 더 거슬리는 것은 놈의 웃는 얼굴이다.
예전부터 활짝 웃는 얼굴이 드물긴 했지만 가뭄에 콩 날 만큼은 있었다. 그랬던 것이, 한달 꼬박을 아무리 지켜보아도 용하가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물론 가짜 미소는 예외로 해두자. 그 가면같은 얼굴이야 얼굴 근육이라도 고장난 양, 24시간 실실 쪼개고 다니니까. 중요한 건 눈. 아무리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눈웃음을 쳐도, 용하의 눈동자는 변함이 없었다. 더불어 그 상태도 꽤나 고약했따. 얼이 빠져있다고나 할까, 흐리멍텅하다고나 할까, 뭐라 말해야하나... 적당한 표현을 찾느라 한참을 헤매던 재신은 겨우 어울리는 표현을 생각해내고 박수를 쳤다. 그래, 인형.
용하가 아직 재신을 쫓아다닐 적에, 청나라에서 거금을 들여 얻은 물건이라고 인형을 자랑한 적이 있다. 아름다운 모양새가 저와 닮지 않았냐고 유독 아끼었지만 어줍잖게 사람을 따라한 모습이나 유리구슬로 만든 눈깔이 이상하게 소름이 끼쳐 그것 좀 치우라며 한동안 질겁을 했었지. 잠시 옛일을 생각하던 재신은 소스라치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미쳤지, 왜 또 그 놈 생각을 한단 말인가, 생각하기를. 이게 다 구용하 때문이다. 지 부귀영화를 위해 몸 바치기로 했으면 좀 더 즐겁게 웃을것이지, 왜 저런 사람 기분 잡치는 표정을 짓고 있단 말인가.
"...뭐, 나랑 상관없는 일이지만."
저런 쓰레기, 어디서 마음을 팔든, 웃음을 팔든, 몸을 팔든 더이상 내 알바 아니다. 끈질기게 들러붙던 철거머리가 떨어져 나갔으니 오히려 하인수한테 고맙다 절이라도 해야겠군. 고맙다, 하인수. 하하하. 재신은 괜히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리며 나무에서 내려앉았다. 그래, 내 알 바 아니다. 알 바 아닌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거야, 썩을!!!!"
이것도 구용하 때문이다. 이 빌어먹을 놈의 구용하, 죽일 놈의 구용하, 거지같은 구용하!!!!! 재신은 일 없이 자꾸 끓어오르는 속을 달래러 오늘도 어느새 그만의 비밀의 장소가 된 정자에서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사라아앙~ 사라아앙~ 내 사라항이야하~ 히끅!"
...익숙한 노랫소리다. 저, 청아한 목소리가 무색할 정도로 음정박자를 깡그리 무시하는 노랫가락은 분명...
"어어라아? 이게 누구야아?"
익숙한 목소리에 얼굴을 찌푸리던 재신은 곧이어 코를 마비시킬 정도로 진동하는 술냄새에 코를 감싸쥐었다. 얼마나 취했는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비틀대는 꼴 하고는. 내일 하루가 또 얼마나 재수없으려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리를 뜨려 했으나 용하가 정자에 엎어지는 것이 더 빨랐다.
"우리 도도하기 짝이 없는 걸오도령 아니신가? 도도하기 짝이 없으니 적토마라 불러드릴까하? 아아, 아니지. 걸오라고 하면 죽인댔지? 우리 도도하기 짝이 없는 문재신 상유께서, 이 초라한 정자까지는 어인 발걸음이십니꽈?"
"...취하려거든 곱게 취해라. 한 번만 더 내눈에 뛰면 죽여버린다고 그랬지."
"그럼 죽여주시게나~ 내 자네가 죽여준다면 어떤 죽음이라도 달게 받지."
"미친 새끼."
미친 놈은 무시하는게 약이다. 자리를 뜨기전에 무심결에 다시 용하를 바라보던 재신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너...꼴이 그게뭐냐."
하도 비틀비틀 거린대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 못한 용하의 몰골은, 달빛 아래에서 바라보니 말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엉키고 설키고 흘러내리는 상투에, 비틀거린다기보다는 절뚝거린다에 가까운 걸음걸이, 입가에 묻은 하얀 자국, 그리고 흐트러져 가슴팍이 보일락 말락한 옷매무새. 아무리 좋게 봐줘도 평범하게 술에 취한 몰골이 아니다.
"아아, 이거 말인가? 자네도 알지 않나~ 내, 오늘도 우리 주인나리께 온 몸을 바쳐 충성하고 왔다네!"
"너, 진짜..."
그러니까 너 하나 좋자고 그 일을 벌였으면 좋다고 웃기라도 할 것이지, 왜 자꾸 이런 모습만 보인단 말인가, 사람 기분 더럽게.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모습에 재신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왜~ 싫은가아? 하긴, 자네가 그토록 싫어하는 노론과 몸을 섞은 남창놈이니 싫을 만도 하지, 푸히히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용하의 입을 솥뚜껑만한 손으로 막은 채 제 가슴에 파묻은 꼴이 되었다. 재신은 재빨리 근처에 사람이 없나를 확인한 후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그마한 소리로 용하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너 미쳤냐...! 그렇게 큰 소리로 지껄이다 걸리기라도 하는 날엔 당장 출재에 청금록에서 영삭된다!"
그런데 이 놈, 으름장을 놓는데도 베시시 웃기만 한다. 도대체 성균관 제일가는 주당이라는 놈이 뭔 일로 떡이 되도록 마신거야.
"다 필요없네, 자네 같은 사람 도움은 다 필요 없어!"
얼씨구, 실실 쪼갤 때는 언제고 갑자기 어깃장을 놓으며 재신을 밀치는 모습에 재신은 기가 막혀 엉덩방아를 찧었다.
"도대체 어디서 얼마나 퍼마셨으면 이렇게 취.....아악!!"
"이 나쁜 놈! 네가 뭐 그리 잘났냐, 앙?! 이 나쁜 놈아!"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진리가 둘 있는데, 하나는 주량이 세면 셀 수록 그 술주정이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과 또 하나는 이 세상에 술 취한 사람만큼 무서운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재신은 그 두가지 진리를 절감하며 꼬집히다 못해, 떨어져나가라 비틀리는 볼살에 눈물까지 찔끔흘리며 용하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었다.
"아이아이아, 이어 오...으끼약!!!(야 이 자식아, 이거 못......끄악!!!!!)"
"네 놈이 잘나면 뭐가 그리 잘났는데, 어?"
"아, 아아으이아 이아 오오....꺼흑!!(아, 알았으니까 일단 놓고.....끄억!!!)"
다행히 볼의 감각이 마비되기 전에 용하의 손은 나가떨어졌다. 새빨개진 볼을 쓰다듬으며 아직 얼굴가죽이 제대로 붙어있나 확인하는 재신의 가슴팍에 물기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 말야... 문재신 자네... 그러는 거 아닐세.. 그러는 거 아니야, 이사람아.."
그러는 네놈이야말로 이게 무슨 짓이냐. 울상을 지으며 따지고 싶었지만 술 취한 사람 상대로 정색을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재신은 참을 인을 되뇌이며 묵묵히 용하의 목소리를 듣기로 했다.
"내가 말했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자네처럼 당당하게 살 수는 없다고."
"....."
잊고싶던 그 날 밤의 이야기. 고개를 돌리며 이야기를 회피하려는 재신과 달리 고개를 재신의 가슴팍에 묻은 용하의 목소리는 절박해보였다.
"니가... 뭘 알아."
"뭐?"
"나라고 좋아서 팔자에도 없는 계간질이나 하고있겠냔 말이다.... 나라고, 너처럼 멋있고 폼나게 살고 싶지 않겠냔 말이다...."
"...너..."
용하의 얼굴을 보려고 어깨를 툭툭 쳐봐도 울고있는 모습만은 보이고 싶지 않은지 재신의 얼굴을 움켜쥐던 양손은 어느새 재신의 옷자락을 부여잡으며 떨어질 생각을 않았다.
"근데,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네처럼 잘나지가 않거든. 난 자네처럼 글재주가 뛰어나지도, 자네처럼 운동신경이 뛰어나지도, 자네처럼 훌륭한 집안에서 나고 자라지도 않았거든. 가진 건 이름뿐인 가짜 족보에, 다른 놈들에게 아부할 넘쳐나는 돈에, 계집처럼 생긴 이 몸뚱이 밖에 없거든. 근데 말일세, 우스운게 그 재물이 아무리 많다해도 권력까진 살 수 없단 말씀이야. 아무리 양반 족보를 사고 양반행세를 하고 다녀도 더러운 중인놈, 양반놀음에 빠진 가짜양반이라는 낙인에 평생 살아가야 한 단 말이야. 그렇게 살면 되지 않겠냐고? 분수에도 맞지 않는 양반 흉내는 집어치우고 송충이답게 솔잎이나 먹고 살면 되지 않겠냐고? 그렇지... 그게 더 쉽겠지... 헌데 말일세, 이 세상이 그렇게 녹록치가 않아... 내가 그렇게 살면 나같은 못난 놈을 아들로 데려와 키운 우리 부모는, 나같은 놈 하나 믿고 그 비싼 양반족보를 덜컥 사들인 우리 아버지는, 앞으로 생길지도 모르는 내 자식새끼는, 나 하나만 바라보고 사는 우리 식솔들은 어찌하란 말인가. 나하나 편하자고 내버리기엔, 나같은 못난 놈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그래서 동경했었다. 나와 다른 너를. 아무리 발버둥쳐도 중인이라는 낙인이 박혀 진흙탕에서 버둥대는 나와는 다르게, 언제나 높은 곳에 있고 언제나 도도하기 짝이 없는 너를. 나와는 너무나 다른 너를. ...좋아했었다.
"...그래서 참을 수 있었네. 그래서 참아야 했네. 그 놈이 날 어떻게 조롱하든, 날 얼마나 비웃든, 그렇게 바라던 '진짜' 양반이 되기 위해선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어. 그 놈이 나를 이용하는게 아니라, 내가 그 놈을 이용하는 거라고 어깃장을 불이며 살아왔네. 헌데.... 그렇게 살아온 내 마지막 자존심까지 자네가 갈기갈기 찢어놓았어."
"......"
왜 그 때 이렇게 말하지 않았냐. 왜 진작 이렇게 털어놓지 못한거냐. 그렇게 헤실헤실 웃고다니더니, 꼴 좋다. 쌤통이다. 내가 그 때 물어봤잖아. 왜 그렇게 당하고만 있었냐고. ...속으로 이렇게 항상 울고있었느냐고 말이다. 사내새끼가 실실 쪼개기나 하고 다니고. 이래서 네 놈이 맘에 안 들었던거야.
"자네는 내가 노론보다 더 구역질 나는 인간이라고 했지? 근데... 나도 마찬가질세. 항상 날 옆에 끼고다니면서 대놓고 조롱하고 유린하는 하인수보다.. 자네가 더 잔인한 사람이야."
눈물 젖은 얼굴을 들며 재신의 얼굴을 툭, 치는 주먹은 너무도 힘이 없어서 재신은 저도 모르게 또 짜증을 부릴 뻔 했다.
"네가 제일 나쁘다고, 이 썩을 놈아."
계집한테 손바닥으로 맞는 것이 이거보단 더 아플거다. 그 정도로 아무 힘도 없는 주먹인데, 얼굴이 아니라 가슴이 아리는건 또 무슨 조화란 말인가.
"......미.."
"욱"
이를 악물던 재신이 입을 열던 그 때, 용하는 입을 틀어막으며 불길한 징조를 보였다.
"너, 너 갑자기 왜 그러냐! 야, 설마...."
이 전조를 재신은 자주 본 기억이 있다. 그것도 술자리에서.
"으욱........"
...확실하다. 재신은 얼마 안 있어 벌어질 참극을 미리 보기라도 한 듯 사색이 되어 용하의 뒤로 돌아서 소리쳤다.
"야, 하지마, 여기서 하지마!! 차라리 하려면 연못에다----"
"우웩!!!!"
이미 때는 늦었다. 저녁식사를 힘껏 게워내는 용하의 뒤에서 재신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기묘한 신음소리를 냈다.
"도대체 저녁을 뭘 처먹었길래 이런 냄새가 나는거야....."
"아이고, 아이고 이를 어쩌나....... 내 더러운 몸 속이 전부 게워져나갔네그려... 더러운 건 더러운 걸로 닦아줘야지..."
조심스레 손가락 사이를 벌려 밑을 내려다보던 재신은 충격적인 광경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도 잊고 용하를 옆으로 밀쳐냈다.
"야, 야 너 지금 뭐하는거야! 당장 옷 안입....아니, 입지마!! 그 오물묻은 옷을 다시 입어서 뭘 어쩌려고!!"
"말했잖나아.. 더러운 건 더러운 걸로 닦아줘야된다고.. 그렇다고 내 몸으로 닦을 순 없으니 옷으로 봐주게~응?"
이미 용하의 고운 비단 도포는 토사물과 뒤섞여 걸레로 그 운명을 달리 한 지 오래다. 값어치는 잘 모르는 재신도 아까운 마음에 탄식을 내뱉었다. 도대체 어디서 술을 마셨길래 이렇게 멍멍이가 되도록 마셨단 말인가.
"어휴.. 내가 이 놈하고 전생에 무슨 원수를 졌다고! 아이고 공자님, 아이고 부처님!!"
"네 도움 필요없다니까, 이 나쁜놈아!!"
"알았으니까 방에라도 돌아가자, 좀!!!"
도포를-차마 손으로 집어들 수 없었기에- 연못으로 걷어찬 뒤, 용하를 업고 돌아가는 길에도 업힌 채로 짧은 손톱으로 재신의 얼굴을 벅벅 할퀴어대는 용하를 내팽개치려는 충동을 몇번이나 참은 재신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두고보자, 구용하. 이 보답은 내일 아침에 꼭 받아낼테다...!!!
- 2010/10/18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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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글수 : 0
"도대체 왜 네놈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거냐, 구용하."
묻고싶은 건 오히려 용하이다. 실수했다. 모란각에 들어서자마자 술렁대는 분위기 속에서 인수의 멱살을 잡은 재신을 발견한 용하는 소리를 지를 새도 없이 간신히 재신의 어깨를 붙잡았다. 설마 이 곳에 재신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계집이라면 질색을 떠는 녀석 아닌가. 그래서 약속장소를 모란각으로 정한 것인데, 성균관에 이야기를 하다 행여 재신에게 이런 모습을 보일까 두려워 모란각으로 온 것인데...
어찌 자네가 이 곳에 있는겐가.
"약속시간보단 좀 늦었군, 여림."
부러 용하를 향해 상냥하게 웃는 인수의 모습에 용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발, 제발 무슨 이야기인지 듣지 않았기를. 그저 인수가 실없이 재신을 모욕한 것 뿐이기를.
"...나가서 얘기하세."
"왜 네 놈이 여기에 있는 지 물었다."
"나가서 얘기하자니까."
"야!!"
"문재신 상유!!!"
문재신 상유. 용하의 입에서는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재신의 이름이다. 지금 누가 누구편을 드는 지나 알고 이러는 것이냐, 네놈은. 부글대는 속을 참지 못하고 용하를 향해 돌아선 재신은 차마 더 이상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나가세. 나가서 얘기해, 제발."
입가에 경련이라도 인듯 하루종일 실실 쪼개고 다니던 미소는 어디가고, 땅바닥에 고개를 떨군 꼴이라니. 그 모습을 보고 차마 용하에게 소리를 지를 수도, 인수에게 주먹을 날릴 수도 없었기에 재신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병풍에 내리꽂았다.
"니미럴!!!"
인수의 멱살을 거칠게 놓은 손이 이번엔 여림의 멱살을 다시 쥐었다.
"넌 오늘 아주 맞아죽을 줄 알아라."
부득부득 이를 가는 재신의 목소리에 이 곳에 여림을 홀로 두고 나갈 수 없다는 배려가 어설프게나마 느껴져 용하는 쓴웃음을 지으며 재신의 손에 끌려나왔다.
"역시 여림은 날 즐겁게 만드는군."
재신과 용하가 방을 나서고, 시간이 그대로 멈춘 듯한 침묵을 깨며 인수는 손에 들린 술잔을 입에 털어넣었다.
"구용하의 일을 알게되면, 문재신이 가만있지 않을텐데요. 비록 소론이긴 하나 대사헌의 아들... 무시할 수 있을만한 사내가
아닙니다."
"나으리, 어찌하면 좋습니까요..?"
"그 구용하가? 그 여림이?"
걱정스러운 찔금3인방과는 달리 머리를 부여잡으며 껄껄대는 인수의 모습은 정신이 나간 것 같이 보이기도했다.
"형님?"
"아.. 미안, 미안하네. 너무 우스워서 말일세. 걱정마시게. 그 놈이 문재신에게 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 따윈 죽어도 없을테니. 그나저나 구용하... 계집처럼 몸굴릴줄이나 안다 생각하였는데 제법 괜찮은 쓰임수가 있었군."
"쓰임수라면...?"
"미친 말에게 좋은 고삐가 하나 생겼어."
그리 말하며 웃는 인수의 눈빛은 다시 얼음장으로 돌아와있었다.
"아야야.. 걸오, 이것 좀 놓고 가주게나. 응?"
"......"
"거, 걸오라고 불러서 안 놔주는 겐가? 그럼 이것 좀 놔주게, 재신이~ 이러다가 숨차서 죽겠어!"
가뜩이나 빠른데다 흥분상태인지라 더욱 빠른 재신의 걸음을 용하가 맞춰걷기엔 꽤 무리가 있었다. 1분도 채 되지않아, 따라걷
는다기보다는 헥헥대며 재신의 손에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가 된 용하가 아무리 투정을 부려도 재신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생각같아서는 지금에라도 당장 바닥에 패대기치고 싶지만 마지막 이성정도는 재신에게도 남아있다. 이런 얘기를 남이 듣게 할
순 없다. 남의 귀에라도 들어가는 날엔, 하인수가 문제가 아니라 용하의 인생이 완전히 매장된다. 그 정도 사리분별은 할 줄
알았다. 이 정도라면 괜찮겠지. 기방에도 멀리 떨어져있는데다 숙성을 위해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창고 속에 들어온 뒤에야
재신은 용하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뭐하자는 수작이냐."
"재신 자네, 보기보다 팔 힘이 아주 세네그려. 이래야 미친 말 답지."
모란각에서부터 용하를 끌고 온 1각동안 용하의 표정은 평소의 장난꾸러기로 돌아와, 그 꼬락서니를 보는 재신은 더욱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무슨 개수작이냐고!! 왜 네 놈이 저 새끼들이랑 같이 있어!!"
"저들과 어울리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나? 오호라, 자네 혹시 질투하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베시시 웃는 얼굴로 돌아온다. 그 미소는 평소와 정말 다를 바가 없어서, 평소와 다름없이 아련하기 짝이 없는 눈빛이어서 재신의 신경을 이렇게나 건드리는 것이다.
"너, 저 새끼들이 너에 대해 뭐라고 지껄이는지나 알고...."
아니라고 믿고싶었다. 녀석들과는 단순히 친우사이로만 지냈을 뿐이라고. 하인수 놈이 그저 농이 지나쳤던 거라고. 자네를 곯려주기 위해 준비한 것이네. 어때, 많이 놀랐는가? 활짝 웃어보이길 바랬다. 그 놀림에 충분히 화낼 준비도, 그리고 용하 몰래 씨익 웃을 준비도 되어있었다. 하다 못해 발뺌이라도 해주길 바랬다. 변명이라도 늘어놓길 바랬다. 그렇게만 하면 당장 하인수를 찾아가 이번에야말로 그 재수없는 면상에 주먹을 꽂을 준비도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런 재신의 바람과는 달리 화풀이하듯 쏟아내는 재신의 말에 용하의 얼굴에는 미소 비슷한 것도 남지않게 되었다. 들었구나. 그렇게 들려주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들어버렸어. 보았구나.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보아버렸어.
"이거이거..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께는 너무 자극적인 이야기였나?"
"야, 구용하...!!"
화를 참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은 것을 멱살을 잡으며 일으킨 용하의 얼굴에 떠오른,
"이래서 내가 자네를 좋아한다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모습이."
여지껏 본 적 없는 냉랭한 미소에, 재신의 세계는 그대로 멈춰버렸다.
"......"
그러니까, 지금 이 모든 걸 인정한다는 말이지. 그렇게 조롱받아놓고, 유린당해놓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 곁을 강아지마냥 빨빨거리며 엎드려 기었단 말이지. 양반으로서의 체면도, 장부로서의 존심도 모두 버렸단 말이지. 나한텐 아무런 말도 없이. 그리고 변명조차 하지않고.
"왜 아무 말도 않은거냐."
"말..해야 하나? 어차피, 아무런 사이도 아니잖아. 우리 둘은."
하긴 그렇다. 서로를 알게 된지 거진 1년. 그 긴 시간 동안 용하에게 마음을 열기는 커녕, 그 흔한 별명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용하에 대해 알기는 커녕 지금껏 그의 본 출신조차, 그가 미소 뒤로 숨기고 있을 지금의 그 심정조차 알지못한다. 언제나 수박 겉핥기. 우리의 사이는 딱 여기까지다. 알아낼 시간은 있었다. 알아낼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다. 알아낼 기회도 하루도 빠짐없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부지기수로 있었다. 의지. 서로에 대해 알아낼 의지만이 둘에게 없었을 뿐이다. 그런 뒤늦은 생각에 쓴 웃음을 머금던 재신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입을 연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하나만 묻자."
"......"
"네 놈이 사람으로서의 수치도 잊은 채 하인수에게 웃음팔고 몸파는 이유가 양반으로의 안락한 삶을 위해서냐, 아니면 그 부용화인지 머시기인지 하는 계집년을 향한 말도 안되는 연모때문이냐."
연모? 연...모... 연모라, 그래, 연모..... 무엇이 우스운지 멱살이 잡힌 채로 낄낄대는 모습은 여전히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
드는 웃음이어서, 재신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자네 마음대로 생각하시게, 다만..."
"......."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네처럼 당당하게 살아갈 수는 없어. ...그리 말해두지."
끝까지 아무런 변명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 얄미웠다. 한마디 부정이라도 했어야한다, 한마디 변명이라도 했어야 한다. 아니면 명확한 이유라도 말했어야 한다. 하다못해 숨겨서 미안하다, 사과라도 했어야 한다. 네 놈이 정녕 나를 벗으로 삼고 싶어했다면 그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다. 이렇게, 이렇게 간단히 믿음을 부숴버리는 건 아니지 않은가. 아니라고. 너만 아니라고 했으면 믿을 수 있었다. 하는 짓마다 재수없기 짝이 없는 장의의 말 따위보다, 차라리 너의 달콤한 거짓말을 믿을 수 있었다.
이유없이 몰려드는 울화와 배신감에 용하의 얼굴을 치려던 재신의 주먹이 맥없이 멈춰섰다. 지금 놈은 떨고있다. 아주 미세한 차이긴 했지만, 허세 가득한 놈의 눈빛에서 알수 있었다. 그래. 어차피 너도 그런 놈이었어. 겉멋만 잔뜩 들어가지고 다른 놈들하고 별반 다를 거 없이 허세나 부리는, 아니 다른 놈들보다도 더 추잡하고 치졸한 놈. 나한테 접근한 것도, 결국은 내가 소론 영수의 아들이어서이지?
-자네가 문재신인가?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데, 집안을 모를 리 없지 않나. 그 당연한 사실을 이제서야 알게 된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놈은 두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패배근성에 찌들어가지고 노론들만 보면 맥을 못추는 소론, 남인놈들. 두번째는 지들만 잘난 줄 알지, 다른 자들은 개만도 못하게 생각하는 노론새끼들."
"......"
"근데 그거보다 더 구역질 나는 건, 간, 쓸개 다 내어주고 둘 사이를 오고가며 박쥐처럼 노는 새끼다. 구용하, 바로 너처럼."
"칭찬 고맙군."
끝까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웃음짓는 모습에 질려, 용하의 멱살을 쥔 손이 힘없이 풀려나갔다.
"너같은 놈을 때리면 내 주먹까지 더러워진다. 앞으로, 내 눈에 두번 다시는 띄지마라. 그 때는 진짜로 죽여버릴테니."
재신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고서야 용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스르르 주저앉았다. 주먹이 또다시 이 얼굴에 강렬히 꽂힐 거라고 각오했는데, 그냥 돌아서는 재신의 모습이 아쉽기까지 했다. 차라리 때리지 그랬나. 그랬으면 자네도 그리 속을 썩히진 않을 것을. 차라리 때리기라도 했으면 얼굴이 아팠을 거 아닌가. 차라리 얼굴이 아팠으면, 몸의 고통에 쓰라린 마음이 조금은 덜 아프게 느껴질 것 아닌가.
-왜 아무 말도 않은거냐.
말할 수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태어나 처음으로 만든 벗에게, 가족 이외에 유일하게 마음을 둔 자에게, ...그리고 평생 이루어지지 않을 마음을 품은 혼자만의 정인에게, 차마 남창처럼 웃음과 몸을 다른 사내에게 판다 말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적어도 재신에게만은 지키고 싶었던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차라리 잘 된 일이다. 어차피 인연이 아니었다. 스스로 이름 짓지 않았던가. 미친 말이라고. 미친 말을 사람이 길들일 수 있을거라 생각한게 애초에 잘못이었다. 미친 말은 홀로 두어야 어울린다. 그 어떤 고삐도, 족쇄도 없이 날 것의 모습 그대로 뛰어다니는 고고한 모습이 어울리고 아름답다. 그러니, 여기서 말의 발을 붙들어 맨 미련의 끈을 놓는 것이 맞는 일이다.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고, 저 푸른 초원을 꿈꾸던 미친 말이 기어이 제를 옭아매던 고삐를 풀고 초원을 향해 달려나갔으니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나. 이처럼 좋은 날에 한 잔 하지 않을수야 없지."
눈 앞에 보이는 아무 술병이나 집어들었다. 웃으며 술병을 들어올려 그대로 제 머리 위에 끼얹는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게 술뿐인지, 아니면 눈물도 섞여있는겐지 용하 본인 외에는 알 도리가 없는 듯 하였다.
"...오늘은 술 맛이 아주 달군."
그 때, 등 뒤에서 조그마한 발자국 소리와 다시 인기척이 느껴진다. 혹시 자네인가. 자네, 걸오인가. 이 모습을 어찌 설명해야 할꼬. 지금이라도 변명이라도 해야할까. 그리하면 날 이 곳에서 구해주지 않을까, 하는 조그마한 희망과 막연한 불안은 이어지
는 강무의 목소리에 다시 내려앉았다.
"형님께서 찾으신다."
그럼 그렇지. 평생을 살면서 그의 기대대로 일이 돌아간 적은 한 번도 없다.
"알았으이. 주인나으리께서 찾으시는데 내 얼른 가야지, 그 분 앞에서 왈왈 짖으며 재롱이라도 부릴까?"
예의 가면을 다시 얼굴에 쓴 채 실실거리며 일어난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 감춘 물기어린 눈빛은 굳이 용하의 눈빛을 읽을 수 없는 강무라도 볼 수 있었다.
"얘기는 잘 끝내고 왔는가?"
다시 불려온 곳은, 재신의 난입으로 완전히 묵사발이 되버린 방 대신, 그 안이 넓고 화려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아마도 좌상이나 병판같은 고관대작들을 위한 방이겠지. 들어오자마자 대답도 없이 갓을 벗어 내던지는 용하를 보며 인수는 혀를 찼다.
"빨리 끝내주시게."
"여기서 끝낼 수도 있다."
인수의 말에 옷고름을 푸르던 용하의 손이 멈칫했다.
"문재신에게 전부 털어놓고 나에게서 벗어날 수도 있어. 잠시 얘기해보아도 알 수 있겠더군. 자네가 어줍잖은 변명 한 마디만 꺼내도 그 치는 그 분노의 화살을 전부 나에게로 돌리고 자네를 감쌀걸세. 지금 여기서 나가면, 여기서 끝내면 평범했던 친우사이로 돌아갈 수 있다. 물론 자네와 나의 인연도 거기서 끝이지만."
"내가 그리할 수 없다는 건 자네가 더욱 잘 알지 않나."
늘 이런 식이다. 항상 부질없는 희망을, 용하가 감히 붙잡을 수 없을 달콤한 말들을 늘어놓으며 확인사살이라도 하듯 제 처지를 확실히 인식시키는 것이 용하를 다루는 인수의 방식이었다.
"걸오와의 이야기는 이미 깔끔하게 정리 되었네. 그러니 더이상 그 친구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어."
"희생정신이라는 건가. 이것 참 논개가 울고가겠군. 안 그런가, 부용화? 아, 부용화란게 문재신에게 붙인 또다른 별호였던가?"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말라고 말하려던 것을 참고 용하는 부르트다 못해 피가 흐르는 입술을 다시 한번 잘근잘근 씹었다. 잠시 뿐이다. 지금 이렇게 인수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동안에도, 인수의 인맥을 통해 뇌물을 수반한 용하의 인사에 그에게 호감을 가진 상층부인사는 꽤 된다. 우리 가문이 조금 더, 최소한 그 신분이 탄로나 후손들의 출세길까지 막히지 않을 정도가 될 때까지만 참자. 그러기 위해 이 집안에 들어온 자신이 아닌가. 착각하지 말아라. 네 놈이 날 노리개 삼아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놈을 이용하는게야.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억지스러운 말에 용하는 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게 용하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다. 이 굴욕을 버틸 유일한 끈이다.
"네 뜻이 정 그러하다면... 다시는 문재신으로 인해 그런 눈을 하지 말거라."
여유로운 표정과는 달리 분노와 투기에 타오르는 인수의 눈빛을 보니 오늘밤은 무사히 넘어가기 힘들 듯 하다. 사르륵. 고운 비단 도포가 몸에서 미끄러져 떨어진다. 용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변명 한 마디라도 해주었으면 이토록 가슴이 답답하진 않았을까. 성균관에 돌아오면서 재신은 수도 없이 자신에게 되물었다. 용하가 아니라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아니라고, 그리 말해주었으면 나는 그를 믿을 수 있었을까. 대답은 '아니다'였다. 비굴하게 어줍잖은 변명이나 늘어놓는 모습을 보고있으면 오히려 더욱 더 주먹질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애초에 용하를 믿을 마음조차 품지 않았다는 걸, 재신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래도 마무리는 깔끔하게 지었군. 고맙다, 구용하. 더러운 모습은 보이지 말아줘서. ...그래도, 용서받지 못한다고 해도 붙잡기는 했어야 되는 것 아니었냐.
으슥한 밤 중에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재신의 모습에 같은 방을 쓰는 학우들은 깜짝놀라 얼른 방에서 튀어나왔다.
"미.. 미안하네! 오늘은 자네가 들어오지 않는 줄 알고... 우리가 성급했네!"
"...구석에서 곱게 쳐자라. 오늘 많이 피곤하다."
힘없이 내뱉으며 자리에 드러눕는 재신의 모습에 두 동방생은 의아해하며 서로를 마주보았다. 방 안에 앉아있기만 해도 꺼지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놈이 쫓아내지도 않고 드러눕다니, 미친 말이 정말로 정신이 나갔나? 그리 생각하며 한 용기있는 유생이 조심스레 감사의 말을 꺼냈다. 말은 안해도, 걸오라고 불릴 때의 재신이 그 말은 무시할지언정 평소보다 온순해진다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고.. 고맙네. 자네도 잘 자게나, 걸오."
하지만 오늘은 날을 잘못 잡았다.
"어이."
"응?"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자, 잘자라고..."
"그거 말고."
"거.. 걸오? 자네 또 왜 그러나...."
순간, 재신의 실낱같은 이성이 완전히 끊어졌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날아갔던 이성이 돌아와 뒤늦게 분노에 휩싸인건지도 모르겠다.
"이 미친새끼가 감히 누굴 그런 더러운 이름으로 불러!!!!!"
재신의 괴성과 함께 얇은 창호지 문과 유생이 마당으로 떨어져나갔다. 갑자기 일어난 커다란 굉음에 놀라 방에서 뛰쳐나온 유생들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왜, 왜 이러.. 컥! 자...모..끅!!"
"이 개만도 못한 놈아! 이 더러운 새끼야!!! 니가 뭔데!! 네놈이 뭐라고!! 이 찢어죽일 놈아!!"
-말하지 않았나, 난 자네가 정말 마음에 든다고.
"개같은 새끼! 계집같은 새끼!!!"
"누....누가 유박사님 좀 모셔오게.. 저러다 살변이 일어나겠어!!"
-자네가 그렇게 개차반이라면서?
영문도 모른채 무자비한 매질을 당하며 혼절한 유생의 모습도, 살벌한 분위기에 말릴 엄두도 못내고 사색이 된 유생들의 얼굴도, 피에 물들어 새빨개진 손도, 얼굴에 튀어오르는 유생의 피도 재신의 눈엔 보이지 않았다.
-미친 말 걸오, 자네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 아닌가?
지금 재신의 눈 앞에 떠오르는 건 오직,
-걸오.. 좋은 이름 같은데.
하루가 멀다하고 그의 앞에서 헤실거리던 그 고약하기 짝이 없는 용하의 웃음 뿐.
"이 더러운 새끼야!!!"
더러운 중인새끼. 더러운 천민새끼. 더러운 남창새끼. 그 말만큼은 차마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제 부귀영화를 위해 웃음이나 팔고 다니는 기생같은 놈. 아니, 기생도 평생 연모하며 모시는 기둥서방이나 지아비 하나 쯤은 있다. 그런 정조와 지조조차도 미련 없이 엿바꿔 먹는 기생만도 못한 새끼, 창기같은 새끼.
"자네 지금 무슨 짓인가, 문재신 상유!!!!"
"왜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은거냐!! 왜 아무말도 하지 않았냐고 물었잖아! 왜, 붙잡지 않은거냐! 붙잡기라도 했으면 전부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고 했는데! 왜! 아니라고 말했어야지. 아니라고 말했어야지!!"
재신이 입에 나오는대로 쏟아내는 분풀이가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유생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재신조차도 제가 뭐라 지껄이는지 알아들을 수 없으니 당연했다. 옆 사람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소란 속에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인식하고 입밖으로 내는 일은 이유모를 분노에 가득찬 재신의 머리에겐 조금 벅찬 일이었다.
"...당장 이 자를 묶게!!"
"놔, 이거 안 놔?! 야, 이 개놈들아!!!"
유박사의 명령에 성균관에서 내노라하는 장정 4명이 재신에게 달라붙었다. 제아무리 재신이라 해도 머리를 흙바닥에 짓밟힌 채로 양손과 양발을 밧줄로 포박하는 데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거 당장 풀라니까!!"
겨우 재신의 주먹에서 해방되었지만 이미 여기저기 붓고, 터지고, 이빨이 뽑혀나가는 바람에 제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게 된 유생의 얼굴을 보며 유박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마 2달은 꼬박 드러누워야겠군.
"일단 짐승을 사람으로 만드는게 순서겠군. 문재신 상유의 이성이 돌아올 때까지 징벌방에 가둔다."
"읍!! 우읍우으읍!!!!!"
재갈에 물려서도 어떻게든 일어나려, 밧줄을 풀어보려 이리저리 펄떡대는 재신의 모습은 마치 사냥꾼들에게 사로잡힌 한 마리의 들짐승을 연상시켰다.
"학문을 익히기 전에 인간이 되라 했다. 징벌방 속에서 그 뜻이 무엇인지 선진들의 말을 되새겨보게"
"으아아아읍!!!"
개소리 집어치워라.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재신의 호통에 유박사는 한숨을 쉬며 문을 닫았다.
"으아아아아아아!!"
짐승같은 괴성을 내지르며 재신은 이번엔 제 머리를 바닥에 찧기 시작했다. 알고있다. 누구에게 화풀이를 해도, 어떻게 화풀이를 해도 이 분노는 절대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 그가 화가 나있는 것은 하인수도, 구용하도 아니었다.
"으으으읍...!!!"
가장 열받고 분통터지는 것은 그런 쓰레기같은 놈을 잠시나마 동무로, 마음을 열 수 있는 벗으로 생각한 제 자신.
"으으아....."
재신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액체가 격렬한 몸싸움으로 인한 땀인지, 눈물인지는 재신조차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 2010/10/18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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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에 들어온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났다. 재신은 방안의 술병을 꺼내들고 으슥한 정자로 나와 드러누웠다. 성균관의 생활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구역질나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공부에는 관심없이 그저 줄타기에만 급급한 유생들, 소론과 노론들의 끝없는 당파싸움, 구역질나는 노론놈들... 그 중에서도 최고를 꼽자면 장의 하인수이다. 입관한지 얼마나 됬다고 벌써 장의 자리에 올라 왕이라도 된 듯 으스대는 꼴이라니..
그렇다고 소론 놈들이 정이 가는 것도 아니다. 시시콜콜 노론놈들과 재신의 눈치보기 급급한 모습들. 동무들과 새 뜻을 펼치려 찾아왔던 성균관은 구역질나는 조정의 일부분일 뿐, 조선에는 여전히 아무 희망도 없다. 재신은 술을 들이키며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이 빌어먹을 일상에 신경쓰이는 부분이 있다면,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와 재잘거리는 계집같은 녀석 정도일까.
"우리 걸오도령께서 무슨 근심이 그리 많아, 이 좋은 밤하늘에 한숨이나 푹푹 쉬고 있는겐가?"
역시 양반은 못되나 보다, 양반한테 양반이 아니라는 것도 웃긴일이긴 하지만. 익숙한 목소리지만 무시하고 옆의 주전부리를 집어먹는다. 용하는 못내 섭섭한 듯이 풀죽은 목소리로 말을 정정했다.
"알겠네, 알겠어~ 이 밝은 달밤에 무슨 근심이 있어 땅이 꺼져라 한숨이나 쉬는겐가? 문재신 상유."
"그러는 네놈이야말로 도가 텄다는 오입질은 어디다 내팽개치고 혼자 있냐?"
"나라고 매일 여인들이나 후리는 줄 아나? 가끔씩은 달밤에 혼자 사색에 젖기도 한다네~"
이미 용하의 집요한 수작걸기에 떼어놓기를 체념한 재신이지만, 그에게도 나름의 고집은 있었다. 걸오라는 별호에는 절대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이다. 반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부르고 있건만 우리 사이는 여기까지다,라고 학을 떼듯이 그가 지어준 별호에는 반응도 하지 않는 재신의 모습이 용하는 내심 서운했다.
"걸오.. 좋은 이름 같은데."
"너, 또 그 개수작 부리려면--"
"알았네, 알았어. 내 조용히 술이나 마시고있지."
익숙한 듯이 재신의 구박을 흘려들으며 나란히 드러눕는 용하의 몸에서 풍겨오는 술냄새에, 재신은 술병을 드는 손을 말리려다 이내 고개를 돌리며 다시 드러누웠다. 질리도록 마시는구만. 하긴, 저 녀석이 취해서 개아들놈이 되든 말든, 알게뭐람.
"...그러고보면, 네 놈이 취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군."
"유일하게 성균관 제일이라 자랑할 수 있는게 있다면 바로 이 주량이라서 말이지."
그건 맞는 말이다. 나름대로 술 꽤나 한다고 자부하는 재신조차 유생들끼리 벌어지는 술자리에서 용하의 취한 모습은 커녕 딸꾹질 하는 모습 한 번을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참 좋은 재능을 발견했구만. 이 참에 그 입에 담기도 민망한 별호도 바꿔보지 그러냐? 주당 구용하."
"자네가 지어주는 별호라면 내 기쁘기 짝이 없지~ 그럼 이제부턴 주당이라 불러줄텐가?"
"됐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둘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다. 말도 안되는 농담 따먹기. 말로는 자네가 마음에 들었다며 달라붙는 용하지만, 대화는 언제나 이런 수박 겉핥기 식이다. 언제나 보이지 않는 벽을 치고있다고나 할까. 용하의 그런 점이 재신에게는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따라 달이 밝아서 그런지 연못도 황금빛으로 넘실넘실 빛나서 아름다우이. 그렇지 않은가?"
용하의 말에 무심히 고개를 들어 연못을 바라보니, 평소에는 잘 몰랐던 풍경이 달빛에 비춰 반짝거리는 모습이 꽤나 장관이었다.
"저 연꽃들을 볼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으로 대단한 것 같아. 저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도 이리 아름답게 피어나는 걸 보면 말일세."
"니가 이름붙인 부용화인지 뭐시긴지 하는 계집도 그렇고?"
흘리는 듯한 재신의 말에 용하는 꽤 감동한 듯 재신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걸오.. 아니, 재신 자네는 아닌척 하면서도 나에 대해 관심이 많나보구만~ 그래놓고 겉으로는 이렇게 쌀쌀맞게 굴고. 에잉, 깍쟁이."
"지랄한다."
또다시 장난스레 재신에게 농을 거는 용하에게 재신은 욕지거리로 일갈했다. 부용화. 성균관에서 모르는 자가 어딨단 말인가. 오입질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용하가 친히 별호까지 붙여주며 특별히 아낀다는 수수께끼의 여인. 아니, 여인인지 사내인지도 모른다.
"어떤 기생년인지 몰라도 남자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가 보군. 그 천하의 구용하가 이렇게 녹아내리는 걸 보면 말이야."
"말조심 하게."
장난스레 내뱉는 재신의 말에 정색을 하며 말을 끊는 용하의 모습에 재신은 무안해졌다. 뭐야, 이거. 평소와는 완전히 반대상황이잖아.
"..미안하네. 하지만 부용화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 치는 이런 이름이 붙은 것조차 알지 못할걸게. 나랑은... 나같은 놈이랑은 완전히 다른 족속이야."
갑자기 정색하며 발끈하는 용하도 용하였지만, 답지않게 자신을 깎아내리는 보기 드문 모습에 재신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야, 니가 뭐가 어떻다고...!!! 아니 그, 그야.. 천하의 한량에 약해빠지고, 글도 천하의 악필도 그런 악필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삽질할 정도는..."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람. 발끈해서 입을 열었다가, 자기도 모르게 용하의 편을 들고있는 자신을 발견한 재신은 화들짝 놀라며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아...암튼, 그 계집도 네 놈이 그렇게 아끼는 걸 보면 너랑 놀고먹기는 할 것 아니냐. 그렇다면 싫어하지는 않겠지."
엉겁결에 팔자에도 없는 연애상담을 하는 재신의 말에 용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마 아닐걸세. 그 치에게는 그런 티 한 번 낸 적이 없으니까."
"뭐? 구용하가? 조선 팔도에 작업 걸지 않는 여자가 없다는 그 구용하가? 너 뭐 잘못 먹었냐?"
"기생들에게도 평생 가슴에 품는 정인 하나가 있는 것처럼 나에게도 평생 가슴에 담아두고 싶은 정인 하나 정도는 있는 법이라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천하의 바람둥이 구용하가 평생 가슴에 품고 살 정인? 지조?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야!!"
"...안 어울리나?"
안 어울리게 진지한 모습에 코웃음을 쳤지만, 용하에게는 꽤나 심각한 문제였나 보다. 물기어린 목소리로 자조하듯 웃는 용하의 모습에 재신은 저도 모르게 안절부절하게 되었다. 이게 모두 이 썩을 놈 탓이다. 제가 답지않게 진지한 척을 하니까 나까지 이상해지는 것 아닌가.
"아니, 그, 그렇게 좋아하면 좋아한다 고백을 하면 될 거 아니냐!"
"말하지 않았나. 나같은 사람은 감히 바라보지도 못할... 절벽 위의 꽃이라고."
"에이씨, 그럼 나보고 뭐 어쩌라고!!!"
가뜩이나 문외한인 분야인데다 평소에는 눈씻고 볼 수 없는 용하의 모습이 답답해 그만 짜증을 버럭내며 바닥에 대자로 누워버렸다.
"에잉~ 자네 지금 질투하나? 걱정말게나, 내 지조 한 쪽은 언제나 자네를 향해있으니!"
"또 맞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지껄여라?"
어색한 분위기를 띄우려 부러 농을 거는 용하임이 느껴져, 재신의 핀잔도 평소보다 맥아리가 없었다.
"...아무런 뜻도 없네. 자네한테 이야기한다고 해결 될 일도 아니지. 다만..."
재신을 향해 장난스레 웃음을 날리다 이내 아까의 쓸쓸한 눈빛으로 돌아온 용하는
"자네한테는 꼭 얘기하고 싶었어."
아주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그 웃음 속에 꽁꽁싸맨 속내를 보인 것 같아 재신은 저도 모르게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기묘한 밤 이후로 둘의 관계에 큰 변화가 생긴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용하는 음담패설과 농으로 무장한채 재신에게 달려들고, 재신은 욕설과 주먹으로 무장한채 용하를 밀쳐내고. 다만, 재신의 주먹이 이전처럼 무자비 하지 못한게 변화라면 변화일 것이다. 오히려 변화가 생긴 건 재신 쪽이다. 요즈음, 재신에게는 신묘한 재주가 하나 생겼다. 초능력자도 아닌 것이, 용하에 한정하여 그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용하의 머릿속에 24시간 내내 가동되는 음담패설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 웃음이 진심인지 아닌지 정도는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 왜인지는 모른다. 어떻게인지도 모른다. 그냥 보이는 걸 어쩌겠는가. 오히려 묻고싶은 건 재신이다. 내가 왜. 내가 왜 저런 능글맞기 짝이 없는 놈 머릿속이나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되는거냐고. 용하의 눈빛을 읽을 줄 알게 된 재신이 얼마 안가 발견한 점은, 용하가 진심으로 웃는일이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물론 이 놈이야 원체 얼굴에 얼굴 근육에 경련이라도 인 듯 헤실헤실 쪼개고 다니고, 사람이 24시간 행복할 수는 없으니 이 녀석이 항상 신나서 웃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쯤되면 그냥 가면이라 해야되나 습관이라 해야되나. 태어나면서부터 벙글벙글 웃으며 태어나지 않았을까, 재신은 조심스레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 웃음은 재신의 앞에도 변함이 없는 것이어서 재신은 그게 부아가 치밀었다. 재수없는 노무 시끼.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말을 하던가, 혼자서 풀던가 계집처럼 실실 쪼개기나 하고. 그렇게 슬픈 눈으로 웃고있는 용하를 보자면 지난 밤 물기젖은 목소리의 용하가 생각나 견딜 수 없었다. 너무 짜증이 나고 짜증이 나서, 이제는 놈이 눈 앞에 보이지 않는 게 더 짜증나게 되었다.
"무슨 일입니까, 한 밤에 부르는 것도 모자라, 이런 닭살돋는 곳으로 부르시고."
"오랜만에 만나는 아비한테 말 지르는 뽄새하고는, 성균관에 들어가서도 예의라고는 눈씻고 찾아봐도 없구나."
"언제 아버지랑 제가 예의차리는 사이였습니까? 하실 말씀이나 빨리 해주십쇼."
아무리 봐도 부자간의 다정한 술상이라고는 보기 힘든 대화에 근수는 혀를 차며 술잔을 비웠다. 성균관에 들어가면 조금은 나아질까 했더니, 저 놈의 싹수없는 성질머리는 언제 고쳐질꼬.
"성균관에, 하인수라는 유생이 있다들었다."
"......"
"나보다 얼굴을 맞대는 네 놈이 잘 알겠지만, 영리한 놈이다. 제가 얼만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 또 그 권력을 어찌 행사해야 하는지, 어느 자에게 엄히 다스리고 어느 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본능적으로 알고있어. 그런 놈 하나 친우로 사귀어도, 나쁠 건 없겠지."
"지금 저보고, 아버지와 같이 살라는 말씀입니까?"
"언제까지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애처럼 살 셈이냐. 성균관은 조정의 축소판이나 마찬가지이다. 계속 그렇게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었다가 물려죽는 건 너다. 정치라는 게, 그런 무서운 놈이야."
"그래서... 그 잘난 정치 때문에 형님이 돌아가시도록 나뒀습니까."
"......"
"그저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형님이 돌아가신 그 때도, 꼬박 한달을 앓아 누우시다 결국은 정신을 잃어버린 어머니를 볼 때도, 그 놈의 정치, 정치, 노래를 부르셨죠. "
"재신이 네 이놈!"
"아버지!"
부자간의 술상 앞에 감히 아버지보다 더 크게 언성을 높이는 불효막심한 아들의 행동에도 근수는 눈하나 깜짝않고 부들부들 떨리는 아들의 손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이런 일로 불러서 시간낭비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아버지를 혐오하고 싶진 않습니다."
"아비한테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냐?"
"살펴가십시오. 먼저 가겠습니다."
저거, 저거저거 저놈을 그냥! 홧김에 뒤돌아선 재신의 머리통으로 술잔을 집어던지려던 근수는 자신의 가슴을 퍽퍽 치는 것으로 분노를 승화시켰다.
물론 아비를 닮아 원래부터 성정이 불같기 짝이 없는 재신이었지만 요 2년 동안 둘의 관계는 부자라기보다는 원수의 그것이었다.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다. 유일하게 어리광을 부리던 헝을 잃고, 어미가 정신을 놓은 게 2년 전. 그 뒤로 재신은 사람답게 사는 것을 포기한 양 저리 미친 짐승처럼 날뛰게 되었다.
하지만 제 속이 설마 저만 할까. 아들은 모른다. 하루 아침에 금쪽같던 장남을 잃고, 인간이 되길 포기한 막내와 현실을 감당하길 포기한 아내를 바라만 봐야했던 가장의 마음을. 누가 들을까 밤에 홀로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아비의 마음을. 좌의정도 결국 인간이기에 저지를 지도 모르는 단 한번의 실수, 그리고 약점이 될 지 자랑거리가 될 지 모르는 그 아들 이선준. 갈아마셔도 시원치않을 두 노론 놈의 모가지를 물어뜯기 위해 칼을 갈고있는 아비의 마음을. 단 한번의 복수를 위해 칼을 숨겨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비굴하게 살아왔다.
그 심정을 아마 아들은 모를 것이다. 아니, 몰라야한다. 개망나니처럼 살아온 놈이지만 누구의 아들인가, 바로 이 문근수의 아들이다. 그 속은 누구보다 곧고, 누구보다 용감하고, 누구보다 고고하고, 누구보다 긍지높다.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났고 자라오길 그렇게 자라왔다. 그런 그였기에 이런 몰라도 될 추잡한 어른들의 싸움까지는 알게하고 싶지 않다. 최대한 아비의 옆에 멀리 떨어트려, 당당하고 고고하게 살게하고 싶다.
"쯧.. 저 철딱서니는 언제나 되야 철이 들려고... 안 그러냐, 영신아?"
이제는 대답할 수 없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빈 술잔에 술을 채운다. 넓은 방 안에 홀로 마시는 술은 적적한 분위기 탓인지 꽤 씁쓸했다.
"썩을...."
재신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계집 웃음소리에 귀를 틀어막으며 모란각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하필 이런 곳에 부른거냔 말이다. 저 영감탱이가 날 놀려먹으려고 작정을 한거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부친의 표정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 알고있다. 부친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그 빌어먹을 당파 때문이었다고, 부친이 막을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닐거라고, 아마도 가장 가슴아플 것은 부친이라고. 머리로는 이해를 하는데도 가슴이 납득하지 않는 것이다. 이게 다 노론새끼들 때문이다. 족쳐야 돼. 지금 당장이라도 성균관 서재로 달려가 노론들의 모가지를 다 꺾어버리고 싶다. 특히 하인수. 제 아비의 권세를 등에 업고 하늘 무서운 줄 모른 체 날뛰는 놈.
"---그러니까, 앞으로 오만방자하지 못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겠지."
...하도 화가 나서 이제는 헛것까지 들리는 모양이다. 고개를 휘젓는 재신의 귀에 이번에는 방정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튼 고 놈만 생각하면 화딱지 나 죽겠습니다요~ 제 놈이 누구때문에 이렇게 됬는 지도 잊어버린 건지!"
병춘의 목소리다. 아무리 화가 나있더라도 얼굴도 생각 안 나는 노론놈의 목소리를 기억해놨다 환청을 듣는 취미따윈 없다. 그제야 재신은 이 곳 모란각이 인수와 그 일행의 단골집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오늘 재수가 얼마나 또 없으려고. 짜증을 부리며 이번에야말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재신은 이어지는 강무의 말에 완전히 멈춰버렸다.
"...병춘이의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구용하의 태동이 형님의 시야에서 많이 벗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이 놈들의 입에서 구용하가 왜 나온단 말인가. 재신은 조심스레 몸을 숨겨 대화를 엿들었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생각 못한다고, 몇년전까지만 해도 내 앞에서 고개도 못 들던 것이 꼴에 양반이라고 목에 힘주고 다니는 꼬라지하고는! 거기다 나으리 은혜도 모르고 요즘엔 걸오인지 뭐시깽이인지 한테까지 들러붙어있지 않습니까!"
"장의한테 붙은것만으론 불안해서 성균관 제일가는 무법자한테 몸을 숨기려는 심산이겠지. 아주 영민하고, 더러운 짓이다. 과연 돈으로 신분을 산 가짜양반 다워."
인수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재신은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가짜..양반? 재신은 갑자기 텅 비어버린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들은 적이 있다. 전쟁으로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죽은 이후, 지금까지도 족보의 위조와 매매가 성행하고 있다고. 설마 그 뼛속까지 화려함에 취한 놈이 그런 사람이었을 줄은...
-나랑은... 나같은 놈이랑은 완전히 다른 족속이야
-...안 어울리나?
그제야 지난 밤, 알 수 없던 용하의 심중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애초에 지깟게 양반족보를 살 수 있었던 것도, 다 나으리가 살펴주신 은혜아닙니까!"
그제야 용하가 왜그리 치장하는 데 집착하는지, 왜 그리 지나칠 정도로 격식갖춰 말하는 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송충이가 분수를 모르고 무릉도원에 빠졌으니... 이제 양반놀음의 대가를 치뤄야지."
대가. 차갑게 웃는 인수의 목소리에 재신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아주 뼈아픈.. 대가를 말이야."
"흐흐흐. 몸을 계집처럼 굴려서 별호에 계집녀를 붙이나, 그 놈은?"
"고봉이, 이 사람!"
강무의 질책보다 문이 부숴지는 것이 더 빨랐다. 그 새 구석에 숨어 벌벌 떠는 병춘, 고봉과 제 기능을 다하고 부숴진 문짝 위로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는 재신이 보였다.
"선비들의 이야기에 양해도 없이 불쑥 쳐들어오는 무례는 미친 말이라서 배운 게 없는 탓인가, 아니면 소론이라서 배운 게 없는 탓인가? 걸오."
"노론 새끼의 더러운 입으로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이름 더러워진다."
"자네가 그 이름으로 불리기 싫어하는 이유가 그 이름을 아껴서인 줄은 여지껏 몰랐군. 앞으론 참고해두지."
"소론이라 배운 게 없냐고? 그럼 그 고상한 노론새끼들께서 엄한 사람 욕보이는 건 또 무슨 지랄같은 취미냐? 장의 나으리."
"...욕보여? 아, 구용하. 그 중인 놈 말이냐."
"중인, 중인, 그만 해라. 사정이 어찌 됐든 놈은 대가를 지불하고 그 자리에 올랐어. 태어날 때부터 머리에 구더기가 그득한 네놈들보다는 백배 낫지."
"서로 추구하는 이상은 다를 지라도, 자네도 나처럼 핏줄을 지킬 줄 아는 선비인 줄 알았거늘. 실망이군."
빈정대며 킥킥대는 인수의 얼굴에 당장이라도 주먹을 꽂아넣고 싶은 걸 재신은 간신히 참았다. 참자. 참을 인, 하나.
"개소리 같지도 않은 망발 집어치워라. 아까 말한 대가라는 게 무슨 뜻이냐. 계집 어쩌고는 또 무슨 말이고."
"참 이상한 일이야? 그 놈이야 자네의 명성도, 신분도 있으니 달라붙는 이유를 알겠지만 아무것도 아쉬울 거 없는 자네가 왜 그 중인 놈은 유독챙기는 걸까? 노론이라면 이를 갈고, 소론과 남인들조차도 무시하며 살아가는 자네가 왜."
"뭐?"
"혹시 정분이라도 난겐가, 그 중인이랑?"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재신은 손이 올라갈 뻔 한 걸 다시 참았다. 참을 인 3번이면 살변도 막는다 했다. 참을 인, 둘.
"자네가 그런 희안한 취미를 가지든 말든 내 알바 아니지만 하나 충고해두지. 구용하를 너무 믿지 않는게 좋을거야. 그 놈은 자네 생각처럼 그리 사람좋은 녀석이 아니거든. 본래 양반도 아니었던 놈이다, 더욱이 후사를 위해 양자로 입양된 놈이라 하니 애초에 그 근본도 알 수 없는 천박한 핏줄. 그러니 계집처럼 야들야들하게 생긴 그 얼굴과 몸뚱아리로... 어떻게든 양반들 속에 살아보겠다며 아둥바둥거릴 수 있지 않겠냔말이야."
"너..... 사람한테 해도 될 말이 있고, 안될 말이 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놈에게는 이미 전적이 있거든."
"...!"
"제법 재미지더라구? 내 밑을 기어다니며 헐떡대는 모습이."
"야, 이 개새끼야!!!"
세번째 참을 인을 외울 이성도, 의리도 재신에겐 남아있지 않았다. 강무가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와장창 술상이 엎어지는 소리와 함께 괴성을 지르며 인수의 멱살을 잡은 재신은 그대로 얼굴에 주먹을 박아넣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왜 그 많고 많은 놈들 중에 하필 네놈이 막는거냐."
"......"
재신의 주먹이 인수의 얼굴에 꽂히기 바로 직전. 그 아슬아슬한 순간에 간신히 재신의 어깨를 붙잡은 하얀 손은 이글거리는 재신의목소리에 말없이 더욱 힘을 주었다.
"아니, 질문을 바꿔야겠군. 도대체 왜 네놈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거냐, 구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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